노우찬은 회화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때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하기도 한다[1]. 생각을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재빠르게 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화가의 방법은 물성을 연구하고, 떠오르는 형상을 구현할 수 있도록 손을 훈련시키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재가 국한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습관으로부터 멀어져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작업은 영원한 유랑일지도 모른다. 노우찬은 이야기를 온전히 회화로써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왔다. 비닐, 마스킹 테이프, 종이보드와 같은 헐거운 지지체를 사용해보기고 하고, 유화, 아크릴, 구아슈 등 건조하는 시간과 질감에 차이가 있는 물감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맞는 매체를 찾아보기도 했다. 손에 맞는 매체를 찾아낸 순간 부터는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지’ 질문하며, 다시 익숙해진 형태로 부터 벗어나는 훈련을 해야했다. 신작에서는 기존의 전시에서 보여졌던 단순화된 형상을 연구하되, 원색에서 벗어나 화면의 소리를 정돈하는 색감을 찾고자 노력했다.
발품을 팔지 않아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실체를 덜 확인하거나 확신할 수 없는 삶이 되었고, 디지털화된 삶이 주는 편의성으로 인해 시간은 확보되었다기보단 쉽게 소모되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작업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다. 많은 정보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경에서,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뭐라도 되어야만 한다고 압박하는 세상에서 회화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걸까? 노우찬은 홍수처럼 불어난 콘텐츠가 야기한 정보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새로운 정보를 깊이 파지 않고 상투적으로 인식해버리는 인지적 구두쇠론을 떠올렸다. 감정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로 그림이 그 자체로 읽힐 방법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노우찬은 어린 시절 새로운 환경 안에서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서로를 모방하거나, 해, 집, 산처럼 은연중 합의해버리고만 아이들의 형상들을 떠올린다. 편안하게 나누어지던 기억 속 형태를 톺아보며, 그는 그림이 여는 서사의 통로를 재건축해 본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성을 느끼고 점선면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활동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작가가 제시한 서사 안으로 들어갈 여지가 필요하다. 관객을 이미지로 초대하는 여지로서, 그는 누구든 접근할 수 있는 친절한 이미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노우찬은 회화적 실천을 ‘계획된 춤과 즉흥적 안무’라는 은유적인 단계로 정리한다. 노우찬의 그림 속에서 안무는 구도, 시점, 점, 선, 면처럼 화면을 분할하고 나누는 단계이다. 노우찬은 그리고 싶은 것들을 평면 안에서 안무를 통해 드러낸다. 이후 춤을 추듯 화면 안에 들어온 장면을 정리하되, 형상보다는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물감을 바르고, 굳히고, 덧칠하며 레이어를 쌓는다. 작업을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작가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손길이 지나간 흔적이다. 필적이나 색감은 거짓말할 수 없는 요소고, 꾸며낸 부분에서조차 작가의 성격이 드러나버리기 때문이다. 새, 해, 산처럼 보편적으로 이해되는 형태들이 노우찬의 언어로 읽히는 이유는, 요약된 형태 속에 작가의 몸짓이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화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 찾아낸 생경함을 그리는 일이지만, 회화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림의 서사가 보는 이의 서사에 맞닿아 연장되어야 한다. 노우찬은 회화의 양가적인 기능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큐레이터 문소영
[1]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할 때, 빛에 의해 반사된 붓의 궤적과 물성, 엉키고 쌓여진 물감의 충돌을 바라본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 그것만 즐길 때도 있다. 노우찬 작가노트. (2024)
전시장에 들어서니 공간 전체에 영사기 소리가 들리며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는 김혜미 작가가 직접 쓰고 그려낸 이야기인 <여행자 이야기>(2023)가 슬라이드 필름으로 영사되는 곳이었지만, 이 오래된 기계의 소리가 전시장의 다른 작업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그 소리는 나무를 깎아내는 행위나, 캔버스 위에 여러 차례 흔적을 남기는 행위와 자연스레 이어졌다. 전시를 함께한 두 작가가 손으로 만들어낸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 오래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관찰하기를 즐겨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김혜미, 노우찬 작가는 공모를 통해 처음 만나 ‘따로 또 같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을 거쳐왔지만, ‘따로’보다는 ‘같이’에 초점을 두어 보게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시 《Tilde 틸데 (~)》는 김혜미 작가와 노우찬 작가가 미술을 대하는 자신만의 언어를 다듬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각자가 사용하는 매체에 관한 실험, 재료를 다루는 방식뿐 아니라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작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두 사람이 작가로서 치열하게 고민해온 많은 내용들은 말줄임표(~) 안에 함축되어 있는 듯 보였다. 이후 작업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작업의 제목들과 서문, 작가 노트들을 보면서 나는 두 작가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언어(text/language)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다양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작업하며 제목과 소재에 있어 다층적인 은유를 사용한다. 다른 사람은 텍스트와는 구별되는 미술만의 의사소통 방식, 즉 고유한 언어로서의 미술을 탐구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김혜미는 스스로의 작업을 소개할 때 다의어를 즐겨 사용하는데, 이는 그가 단어의 어원을 폭넓게 탐구해온 결과다. 이를테면 그는 이라는 단어를 통해 바다를 항해하는 배, 무언가를 담는 용기의 의미를 한곳에 함축한다. 나무로 깎아낸 디저트의 형상을 만들면서 사막(desert)와 디저트(dessert)의 언어적 유사성을 통해 둘 사이의 근원적 연관성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여러 개의 판넬을 붙여 병풍처럼 화려하게 펼친 목판화 작품 에서는 일종의 역설법을 사용한다. 또한 <벤야민의 가방>(2023-24)에서는 매체철학으로 잘 알려진 발터 벤야민과 그가 외국에 체류하며 수집했던 공예품들, 즐겨 먹곤 했던 케이크와의 연관성을 발견한다. 기록된 텍스트와의 관계를 통해 디저트는 문화적이면서 철학적인 대상이 된다. 목판화와 목공예, 그리고 책 사이를 오가며 작업하는 김혜미에게 참고문헌들을 탐독하고 목록화된 단어의 의미들 사이에서 유영하는 일은 단지 리서치 단계를 넘어서는 작업의 일부분인 셈이다. 한때 도서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도 한 그의 작업에서는 어딘가 사서와도 같은 면모가 함께 느껴진다.
한편 노우찬은 그림 앞에서 어떠한 정보를 ‘읽으려’ 하는 시도를 멈출 것을 권한다. 그림을 처음 배웠던 유년 시절에 모두가 그렸던 해, 산, 꽃, 과일, 비행기 같은 도상을 보며 ‘이게 무엇을 그린 것인지’ 질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고 출발하여 그가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회화 특유의 표면이다. 말하자면 회화는 회화만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며, 그렇다면 그 언어는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자기만의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이 현재 그가 집중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전시된 그의 모든 그림은 ‘덧그려진’ 그림이다. 표면을 덮고 덧그리고, 다시 덮고 덧그리는 과정에서 흐리게나마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이 한 화면에 담긴다. 이를테면 <개미집>(2023)에서 개미는 한 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데, 어떤 관람자는 물감에 덮여진 개미의 형상을 관찰해내거나 심지어는 사람의 형상을 찾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지우고 덧그리고, 숨기고 드러내는 표면은 회화를 (읽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보게끔 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묘한 우연의 산물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노우찬의 <빨간 과일>(2023)에서, 의도치 않게 표면에 그대로 남아 있던 작가의 메모는 내게 유의미한 인상을 남겼다. 연필로 적은 그 메모는 ‘회화’와 ‘본다’를 연결 짓고 사람들은 무엇을/어떻게/왜 보는가, 그리고 ‘유일하게 회화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인가?’를 질문한다. 이어서 ‘그것은 점점 소멸하는 중인가?’에 대한 답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 질문의 대상을 ‘회화’가 아닌 ‘미술’로 바꿔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라는, 전시라는 형식을 고수하는 것에는 현재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망설임이 동시에 수반된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형식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동시대적인 매체를 수용하는 법도 배워야만 한다. 그렇게 한 화면 위에서 과거와 미래는 뒤섞이고 서로 다른 시점들이 대화한다. 이것을 언제까지 이렇게 지속할 수 있을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고민하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주저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가는 사람들이 있다.
김혜미는 작업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시를 위해 작업을 만들기보다는 작업실 책상 위의 모습이 자연스레 전시로 옮겨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것은 두 작가가 공유하는 태도로 느껴졌는데, 자기 안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내보이는 과정에서 억지로 끼워맞춰진 부분이 없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두 작가의 작업을 보게 될 사람들 또한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즐겁게 유영하게 되기를 바란다.
글: 페리지 갤러리 큐레이터 김명진